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덴노 (문단 편집) == 기타 == * 근대 이후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한 명이다.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 68년(86세), 빅토리아 여왕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하지만 앞의 두 인물보다 쇼와 덴노가 더 주목받는건 앞의 두 인물은 1848년 혁명 이후로는 불안정하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운 치세를 보냈지만, 쇼와 덴노는 어린 시절에 조국의 근대화를 보고 자라고 본인의 재위 초기에는 조국이 [[미국]]을 상대로 큰 [[태평양 전쟁|전쟁]]을 벌이다 패전하였으며, 이때 위기를 겪었지만 [[6.25 전쟁|1950년 자신이 착취했던 옆나라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조국의 경제 고도 성장은 물론, 눈에 띄게 변화된 사회상까지 보고 죽었던 것이다. 일본의 각 연대 별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덴노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도 1명 더 있는데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본인은 감히 조부이자 성군인 성조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자진 퇴위하여 나온 값이기 때문에 태상황제로서의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대 인물 가운데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었다. 89세에 70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를 뻔 했으나 2016년 10월 13일, 만 88세로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 왜인지는 몰라도 극단적으로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여, 의회가 열릴 때나 군대를 사열하는 꼭 참가해야만 하는 행사 이외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 게다가 의전 절차에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고, 이러한 습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처럼 쇼와 덴노 본인의 대인기피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격한 (폐쇄적인) 황실 교육의 영향 탓이었는지는 원인불명이다. * 워낙에 온실의 화초처럼 정말 귀하게 자란지라, 황태자 시절 [[영국]]을 방문했을 때 [[런던]] [[지하철]]을 처음으로 타보게 되었다. 이때 차표를 역무원에게 건네주고 개찰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차표를 소지한 채로 개찰구를 지나가려다 그가 황태자인지 모르는 역무원이 그를 제지하면서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럽 순방 당시인 [[1921년]]은 일본에 지하철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노면전차는 있었지만 일본 최초의 지하철인 [[긴자선]]은 쇼와 덴노가 천황으로 즉위한 이후인 1927년에 개통되었다.] 그리고 실랑이를 벌이던 차표는, 일본으로 가져와서 현재 궁정기념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또 한번은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 최고의 차였던 [[메르세데스-벤츠 770|메르세데스-벤츠 770K]]를 쇼와 덴노에게 선물했지만, 정작 쇼와 덴노는 승차감이 나빠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차는 현재 독일의 벤츠 박물관에 [[빌헬름 2세]]가 타던 동일 모델의 차량과 함께 전시되어있다. * 선천적으로 건강이 좀 좋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와 마찬가지로 걸어다닐 때 발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 태어날 때부터 [[척추]]가 굽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근시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안경]]을 써야만 앞이 보였을 정도로 안경은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그의 '대인기피증'은 여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했다고 한다. * 황실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에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후궁]]을 들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모두 거절했고,[* 아버지인 [[다이쇼 덴노]]는 [[데이메이 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넷이라 [[후궁]]이 필요가 없어서 들이지 않은 것이라, 그 시절까지는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후궁을 들인다"는 옛날 정서가 남아 있었다.] [[1933년]] 첫아들 [[아키히토]]가 태어난 뒤에야 여론이 없어진다. * [[1959년]], 평민 출신의 [[쇼다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하여 '''일본 최초 평민 출신의 황태자비'''가 되었다. 쇼와 덴노가 찬성했기에 아키히토는 미치코와 혼인할 수 있었다. 당시 [[나가코 황후]]와 쇼와 덴노의 동생들 부부, 전 황족들과 [[궁내청]]이 그리 강경하게 반대했음에도 이들이 혼인한 것은 아키히토의 아버지 쇼와 덴노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당시 쇼와 덴노는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며 아내 [[고준 황후]]처럼 그렇게 심하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이후 장장 40년동안 지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죽을때까지 미치코를 극도로 싫어했던 [[고준 황후|아내]]와는 다르게 미치코와 사이가 좋았으며 아내와 며느리가 싸울때마다 가운데에서 중재자 역할을 많이했다. * [[파일:쇼와 천황 시라유키.jpg]] 열병식 등에서 자신의 애마인 '시라유키(白雪)'를 자주 탔었다. 시라유키는 1921년 헝가리 국립 목장에서 태어난 [[아라비안(말)|아랍종]] 백마이다. 쇼와 천황이 군복을 차려입고 백마에 올라탄 모습은 대전기 일본 제국의 프로파간다로 자주 사용되었다. * 일설에는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도쿄]]에 진주한 지 1달 동안 쇼와 덴노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자 쇼와 덴노가 직접 출두해 찍은 사진이 2장이며, 그중 쇼와 덴노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맥아더에게 굽신거리는 사진이 있으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찾기 힘들어졌다는 [[루머]]가 있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이나 당시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맥아더의 환영 인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는데,[* 당연하지만 고개를 숙였다고 굽신거렸다고 할 수는 없다. 쇼와 덴노는 자신의 백성들과 대화할때도 예의를 갖췄다.] 이 얘기가 전해지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쇼와 덴노가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굽신거리는 사진이 찍혔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애초에 흔히 사람들이 완전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맥아더는 쇼와 덴노를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로 대접했으며 그에 걸맞은 예의도 갖췄다고 한다. 위에 나와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 특유의 허리 편 자세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맥아더의 회고록을 보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나 맥아더는 분명히 쇼와 덴노에게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 2022년 우-러 전쟁중 우크라이나 측이 러시아를 비판하기 위해 히틀러(독)-무솔리니(이)-쇼와 천황(일)의 사진을 올렸는데, 일본 측의 [[https://youtu.be/3q7nMJw6pcc|거센 항의]]를 받고 사과를 했다. 이후 파시즘 지도자임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만 남기고 삭제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도조 히데키]]가 있기는 하지만 [[쇼와 덴노/전쟁 책임|위 문서]]에도 나와있듯 결코 그들과도 무관하지도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